‘왕사남’에서 수양대군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장항준의 의도 빛난 ‘왕과 사는 남자’


[TV리포트=강해인 기자] 단종의 시간을 새로 쓴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과 만났다.

지난해 세조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시의 광릉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세계 문화유산인 광릉은 지도 앱에서 평점 1점과 함께 욕설 등의 댓글로 곤욕을 치렀다. 많은 작품에서 세조가 잔혹한 폭군으로 그려졌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중이 광릉에 분노를 표하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로 인해 세조를 향한 대중의 분노가 더 커질 것만 같다.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는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잃고 유배를 간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의 이야기다.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는 이홍위를 감시게 되고, 삶에 의지를 잃은 그에게 점점 마음을 연다. 그러던 중 이홍위를 경계하던 한명회(유지태 분)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유배지에 있던 인물들에게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왕사남’은 역사가 스포일러이기에 많은 관객은 결말을 알고 관람하는 영화다. 그러나 스크린에서 단종의 시점을 제대로 담은 영화가 적었고, 이 비극적인 왕에게 이입해볼 기회도 적었기에 특별한 작품이다. 영화는 이홍위가 왕위를 뺏기는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은 생략했고, 영화 전체를 봐도 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수양대군을 부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항준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시대를 다룰 때 단종은 짧게 언급되며 배경처럼 지나가고는 했다. 중심이 되거나 부각되는 인물은 늘 수양대군이었다. 913만 관객을 동원했던 한재림 감독의 ‘관상'(2013)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수양대군을 연기한 이정재의 등장 씬은 한국 영화 3대 등장씬으로 불릴 정도로 임팩트가 있었다.

장항준 감독은 주연이었던 수양대군과 조연이었던 단종의 위치를 뒤집었다. ‘왕사남’에서 수양대군을 희미하게 하면서 단종의 서사와 그의 주체적인 면을 더 부각하는 연출을 시도했다. 영화 속 이홍위는 강단 있고, 소신이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유배를 당한 뒤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절대 권력 앞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인물로 표현됐다.

이홍위의 대척점에 있던 수양대군의 자리는 새롭게 해석된 한명회로 채웠다. 세조의 책략가이자 계유정난을 설계한 한명회는 세조의 폭군 이미지가 강화되면서 간신으로 표현돼 왔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는 체구가 크고 지모가 남달랐다고 기록돼 있었고, 장항준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매력적인 빌런을 만들었다. 유지태는 듬직한 체구와 카리스마로 아우라를 만들었고, 덕분에 장항준 감독은 수양대군 없이도 단종의 이야기를 스릴 있게 전개할 수 있었다.

단종의 주체적인 면을 새롭게 조명한 ‘왕사남’은 초반부는 코믹함으로 웃음을 주고, 후반부엔 쌓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감동을 전한다. 장항준 감독이 평소 보여준 유쾌함과 유머러스한 면이 영화에 담겨 있다는 인상도 받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새로운 시도가 무난한 상업영화의 틀 안에 담겨 아쉬운 면이 있지만, 흥행작이 필요한 영화계 상황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선택으로도 보인다.

‘왕사남’은 배우들의 연기가 오래 회자될 작품이다. 유해진은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으로 웃음을 만들며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는 역사책을 찢은 듯한 비주얼로 조선시대 인물을 몰입감 있게 소화해 냈다. 친근하고 정 많은 모습으로 관객의 마음을 녹인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의 연기를 좋아한 관객이라면, 이번에도 즐길 요소가 많다.

박지훈은 이홍위의 서글픔과 분노를 절제된 눈빛 안에 담아냈다. 유해진과 케미를 맞춘 신에서는 부드럽고 친근한 모습으로 웃음을 만들고, 유지태와 부딪히는 신에서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극의 온도를 올렸다. ‘왕사남’에서 가장 울림이 있는 종장에 배치돼 있다. 마지막을 앞둔 이홍위의 결연함, 그리고 이홍위의 마지막 부탁을 행하는 엄흥도의 처량한 모습이 관객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왕사남’은 단종의 시대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웃음과 감동까지 잡으려 했던 영화다. 대중이 좋아할 코드가 많고, 박지훈과 유해진의 케미가 빛나 좋은 반응이 예상된다.

강해인 기자 [email protected] / 사진= ㈜쇼박스